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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경주 감은사지, 문무왕의 호국정신과 아들 신문왕의 효심이 서린 곳

by 드래곤포토 2018.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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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의 호국정신과 아들 신문왕의 효심이 서린 곳, 경주 감은사지

동해의 문무대왕릉의 일출 촬영후 경주시내로 들어오는 길에 사적 제31호 감은사지를 들렀습니다.
감은사는 죽어서도 용이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을 위하여 세워진 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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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보니 곱게 다듬어진 언덕에 두개의 석탑이 나란히 서있고 아침 햇빛이 뒷동산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관광객을 위한 듯 석탑 가운데 앞으로 오르는 데크계단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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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크계단을 오르면 왼쪽(서쪽)과 오른쪽(동쪽)에 동일한 모습의 삼층 석탑이 보입니다.
가까이서 보니 규모가 대단합니다.

금당 앞에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삼층석탑은 높이가 13.4m로 장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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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12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은 현존하는 신라 삼층석탑중 최대의 크기라 합니다.
목탑형태에서 석탑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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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삼층석탑 뒤쪽으로 감은사 영욕을 묵묵히 받아낸 느티나무가 말없이 서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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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이 있었던 뒤로 강당터의 기초만 보이고 있을 뿐입니다.
감은사지 서쪽 산기슭엔 대나무숲이 우거져 있습니다.

바람부는 날이면 댓잎에서 형용할 수 없는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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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을 둘렀던 회랑터의 모습이 그 흔적을 보여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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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절터를 보면 중문,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사방이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는 구조입니다.

금당 앞에 세워진 동.서 삼층석탑. 감은사는 사천왕사와 함께 2탑1금당식 가람배치를 처음 시도하였으며, 통일신라 사찰 가람배치의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감은사지의 석탑 형태나 양식, 가람배치, 축대를 쌓아 조성한 부지 등은 후대에 사찰건축에 큰 영향을 준 사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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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역사속 전설을 간직한 감은사지, 지금은 쓸쓸한 폐사지이지만 과거에는 한때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고 생활했던 선인의 숨결을 느끼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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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 창건 설화를 입증하는 금당지입니다.
죽어서도 용이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의 대왕암에 장사 지낸뒤, 용이 된 부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금당 밑에 편평한 석재와 돌기둥을 조립한 높이 약60cm의 공간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일제시대 이 구조물을 방공호로 사용하는 바람에 일부가 훼손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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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는 신라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왜구의 침략을 막고자 이 곳에 절을 세우기 시작하여 아들인 신문왕 2년(686)에 완성한 절입니다.

삼층석탑은 이중 기단위에 몸체 돌을 올린 모습으로 처마밑은 받침이 5단이며 지붕 위는 고면을 이루어 통일 신라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입니다.

1959년 12월 서탑을 해체 보수할 때는 3층 몸돌에서 건립 당시 설치하였던 매우 정교하고 귀중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습니다.

1996년에 동탑을 해체, 보수하였는데 3층 지붕돌의 상면 사리공에서 금동사리함이 발견되었습니다. 경주에 있는 3층 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한 규모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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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감은사는 토함산에서 발원한 대종천이 동해바다와 만나는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인공적으로 축대를 높게 쌓아 조성한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이전에 주로 조성되었던 평지사찰에서 경사진 지형에 축대를 쌓아 조성한 산지사찰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은사 아래는 넓은 논들이 있는데, 예전에는 원래작은 석호(潟湖)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아들 신문왕이 부왕에 대한 은혜에 감사하며 사찰을 완성하고 이름을 감은사라 하였다고 전합니다.

휑하니 두개의 3층 석탑만 서있지만 옛 경주의 화려한 시절을 상상케 하는 곳입니다.

여행 TIP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55-3


- 드래곤의 사진속 세상풍경 / 이창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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