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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인천여행 7] 이민자들의 정신적인 귀환, 한국이민사박물관

by 드래곤포토 2010.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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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년전 하와이는 가난한 한국인에게는 기회와 꿈의 땅이었다. 한국이민사박물관에는 121명의 첫 한국인 이민자들을 시작으로 눈물겨운 이민생활을 통해 독립자금도 마련하고 자식교육에 모든 것을 바친 우리나라 하와이 이민자들의 애환이 담겨있다.

DSC09683 한국이민사박물관 전경
DSC09700 하와이이민 모집광고

1903.8.6자로 각처에 내붙인 모집광고인 '고시'는 하와이에서 영문으로 작성되어 한국으로 보내진 것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하와이의 사탕수수와 파인애플농장의 저임금 노동자를 찾기위해 미국정부는 처음엔 중국인들을 이민자로 받아들이다가 중국인들이 많아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인들을 이민자로 받아들엿다. 그러다 점차 저임금 노동자를 찾아보다가 한국인들의 이민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DSC09698 1904년 대한제국에서 발행한 집조(당시 여권)
DSC09696 수민원 초대총재 민영환

당시 고종황제는 농장이민을 위한 기관으로 수민원(綏民院)을 설치해서 지금의 여권인 집조(執照)를 발급했으며,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내리교회 존스목사와 같은 선교사들을 통해 많은 수의 기독교 신자들을 포함 121명의 첫 이민신청자들이 생겨났다.

※ 박물관에는 유민원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수민원의 오타인 것 같아 박물관에 수정요청을 하였습니다.

DSC09705 당시 인천항 부두

1902.12.22 첫이민자 121명은 일본배 켄카이마루(玄海丸)호를 타고 제물포를 떠나 12.24 나가사키항에 도착하였으나 신체검사에서 19명이 탈락하여 102명만이 하와이로 가는 갤릭호를 탈 수 있었다. 1903.1.2 일본 나가사키를 출항한 갤릭호는 1.13일 아침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DSC09717 총6회에 걸쳐 이민자를 수송했던 갤릭호 모형

처음 121명이 인천 제물포를 떠났으나 일본 나가사키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19명이 탈락, 102명만이 갤릭호를 타고 1903.1.13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보건당국의 검사결과 질병자 16명이 발견되어 탈락하고 결국 86명만이 상륙허가를 받았다.

DSC09708 갤릭호 승선자 물품

거주지 분포를 보면 제물포 67명, 부평 10명, 강화 9명, 서울 7명, 경기도 3명, 나머지가 6명으로 인천출신이 86명(84%)로 이민 모집 초기에는 인천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엇다. 내리교회 존스목사가 교인들에게 이민을 적극 권유했기 때문에 인천출신이 많았다.

DSC09720 사탕수수 농장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초기 이민자들은 하루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하면서 이민생활을 개척해 나갔다. 한일합방으로 돌아갈 나라조차 잃었던 이민자들은 주일이면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어려움을 견뎌냈다.

DSC09738 교회의 역활

교회는 한인공동체의 구심점이자 초기 이민자들의 안식처 역활을 했다. 1903년 호놀룰루에서 정기적인 예배가 시작되어 1905년 해외 최초의 한인교회가 에바농장에 세워졌다.

DSC09736 사진신부

혼기를 넘긴 노총각들의 결혼문제는 초기이민자들이 배우자를 구하기 어려워 이를 해소하기 위하여 사진만 보고 배우자를 선택하는 사진결혼을 시키게되었다.

1910-1924까지 중매쟁이를 통해 사진만 보고 700여명의 여자들이 하와이로 가게되었다. 생활이 어려웠던 이민자들은 새로 찍은 사진을 보낸 것이 아니라 과거 젊었을때 사진을 보내다 보니 사진나이와 실제나이가 많이 틀렸다 한다.

DSC09735c 배우자를 찾아 여러섬으로 흩어지기 직전에 찍은 사진(1913)

사진만 보고 결혼하다보니 그들의 평균 나이차이는 무려 15살이나 되었다. 아무튼 이들이 초기 한인사회를 형성하였고 개척자로서 적극적인 삶을 꾸려 나갔다.

DSC09739 당시 교실

눈물겨운 노력으로 하와이에 정착한 이민자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돈을 쪼개 독립자금으로 썼고 자식들의 교육에 모든 것을 바쳤다.

DSC09740 당시의 교과서

점차 노동조건이 좋아지자 열악한 하와이 농장을 떠나 도시로 이주해 식품점, 양복점, 세탁소 등 자영업을 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이민자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교육에 많은 투자를 했기 때문이라 한다.

DSC09749 의연금 증서

당시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가 세운 한인기독학원은 초등학교로 매년 8-90명의 학생이 배출되었고 점차 많은 교육기관이 생기자 한인기독학원을 매각한 15만 달러가 지금의 인하대하교 설립자금으로 활용되었다.

DSC09753 인하대학교를 설립한 배경설명

인하대학교는 인천과 하와이의 첫자를 따서 인하(仁荷)라는 교명이 만들어졌다. 인하대의 설립은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부지매각대금 등으로 지어진 하와이 교포들의 정신적인 귀환이다.

DSC09764 2008.10.3 재외동포재단이 세운 기념비

한국이민사박물관은 미주 이민 100주년을 맞아 선조들의 해외활약상과 개척자적인 삶을 기리고 그 발자취를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인천시민들과 재외 동포들이 함께 뜻을 모아 2008.6월 건립된 박물관이다.

DSC09768 박물관에서 보이는 월미산 전망대

지금은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코리안 드림을 일구기 위해 우리나라에 오듯이 100여년전 우리 선조들이 현지인들의 괄시를 받아가며 개척한 삶을 돌이켜 볼 수 있도록 건립한 한국이민사박물관은 월미공원안에 마련되어있다.

여행 TIP

소재지 :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1가 102-2 (문의 : 032-440-4710)
입장료 : 무료(개관기념으로 한시적)
관람시간 : 09:00-18:00 매주월요일, 1.1, 공휴일 다음날 휴관

다음은 월미산 전망대에 오릅니다.

- 드래곤의 사진속 세상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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