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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부여여행] 장중하고 세련된 정림사지 5층석탑

by 드래곤포토 2010.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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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림사지는 백제가 부여로 왕도를 옮긴 시대(538-660)의 중심 사찰터로 현재는 백제시대에 건립된 오층석탑과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불좌상만 남아있다.

오층석탑은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에서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는 귀중한 석탑이다.

DSC02542 5층석탑과 강당
DSC02586 정림사지 배치도

정림사지의 주요건물 배치는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의 중심축선이 남북 일직선상에 놓인 일탑식 가람배치이다. 이런한 가람배치는 고대 일본의 사찰 가람배치에도 영향을 주었다 한다.

DSC02548 부여 정림사지 터

부여정림사지는 백제가 사비로 도읍을 옮긴 직후에 세운 절터로 백제시대의 전형적인 1탑 1금당식 가람이나 백제시대 절 이름은 알 수 없다.

1028년에 만든 기와에 정림사라는 명문이 있어 고려시대의 절이름이 정림사인 것으로 밝혀졌다. 남북 직선상에 중문, 탑, 금당, 강당을 배치하고 주위를 회랑으로 둘러진 형태이다.

가람 중심부를 둘러싼 회랑의 형태가 북쪽에서 간격이 넓어진 사다리꼴이라는 점, 그리고 중문 남쪽에 2개의 사각형 연못과 남문터가 있는 점 등이 배치의 특징이다.

DSC02550 연못
DSC02576P
DSC02552 국보 제9호 정림사지 5층석탑

정림사지 5층석탑은 1,400년전 백제시대부터 부여시가지 중심 정림사지 절터에 묵묵히 한자리를 지켜온 백제탑이다. 익산 미륵사지의 석탑과 더불어 고대 삼국시대 석탑의 처음 모습을 밝혀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정교한 판축 기단위에 8.3m, 149장의 화강석으로 세웠다. 백제가 서기 660년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할 때, 사찰은 전화 속에 불타버리고 오직 석탑만이 전하여 온다. 첫째 탑신에는 당나라 장국 소정방의 전승기념문인 '대당평제국비명'(大唐平濟國碑銘)이 4면에 모두 새겨져 있다.

DSC02572P

현존하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된 탑이며, 목조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처음 양식으로 비례구성과 구조수법이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와 함께 현지에서 바라보면 부드럽고 따뜻한 백제문화 이미지가 사실 그대로 느껴진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백제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보여주는 탑으로 정돈된 형태나 장중하고도 세련된 아름다움이 백제인의 솜씨를 보여준다.

DSC02568 5층석탑과 강당사이엔 금당터만 남아있다.
DSC02560 강당
DSC02557 보물 제108호 석불좌상

부여 정림사지 석불좌상은 고려시대 만들어진 작품이다. 불에 타고 심하게 마모되어 대좌와 불상이 형체만 남아있다.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두 손의 표현으로 보아 진리를 나타내는 비로자나불상으로 짐작된다. 머리와 갓은 후대에 복원한 것이다.

대좌는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단정하면서도 균형있는 조각솜씨를 엿볼 수 있다. 석불이 있던 절은 6세기 중엽에 창건된 것이다. 정림사는 이 절의 고려시대 이름인데 1028년에 만들어진 기와 명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DSC02558P

고려초에 절을 다시 세울 때 백제시대의 강당자리를 금당으로 삼아 이 석불을 주존불로 모셨다. 남원 만복사 대좌와 함께 11새기 고려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DSC02585 백제의 숨결을 느끼며 나오는 길에 다시본 정림사지터

여행 TIP

관람료(정림사지박물관 포함) : 어른 1,500원, 청소년 900원, 어린이 700원
소재지 :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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