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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나주여행] 나주목의 객사 '금성관'

by 드래곤포토 2012.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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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금성관은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하였던 객사(客舍)중이 하나입니다. 객사는 고려 전기부터 있었으며 외국 사신이 방문했을 때 객사에 묵으면서 연회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이후 조선시대 때에는 객사에 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예(망궐례)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동쪽 익헌과 서쪽 익헌을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하였습니다.

IMG_1150 망화루

망화루는 나주목 객사 금성관의 가장 바깥에 있는 문으로 세 칸 규모의 2층 문루입니다.

IMG_1156 중삼문

금성관의 정문인 망화루를 지나면 나주목 객사 금성관의 외삼문과 내삼문 중간에 있는 출입문입니다.

IMG_1158 금성관

가운데 있는 건물이 금성관으로 그 앞에 가장 안쪽에 있던 출입문인 내삼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빈터만 남아있습니다.

IMG_1161 금성관

금성관은 나주목의 객사 정청으로 객사는 관찰사가 관할 구역을 순행할 때 업무를 보는 곳이며 중앙의 사신이 묵던 곳입니다.

DSC01664 금성관내부

특히 정청(나주목 금성관)에는 전패와 궐패를 모셔두고 망궐례를 행하던 공간입니다. 즉 사신을 접대하고, 왕정의 위덕을 펴서 관의 위엄을 세우는 곳이었습니다.

나주목 객사 금성관은 이유인 목사(1487.4.12~1489 재임)가 망화루와 함께 건립하였습니다. 이후 임진왜란때 피해를 입어 김개 목사가 1617년 4월21일 중수하고 1775년 이명증 목사가 개수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나주군청사로 사용되다가 1963년 보수를 거쳐 1976년 전부 해체 복원하였습니다.

DSC01661M 금성관 중건기

금성관 내부 상단에 1977년 금성관 중건기가 기록된 나무판이 걸려있습니다.

DSC01669 금성관 내부 문틀로 본 중삼문과 망화루

이후 나주목 금성관 복원 정비사업으로 금성관 앞을 가리고 있던 나주군 청사를 헐고 금성관의 동익헌(벽오헌), 서익헌을 복원(2004~2008)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IMG_1181 동익헌

동익헌은 나주목 객사의 동쪽에 있는 건물로 관찰사가 나주에 왔을때 집무처로 사용하였으며, 품계가 정3품 이상의 관리가 묵던 곳입니다. 조선초 이행 관찰사가 벽오동 나무가 근처에 있어 벽오헌이라 이름지었다고 전해집니다.

IMG_1183 서익헌

서익헌은 나주목 객사의 서쪽에 있는 건물로 품계가 당하관(종3품 이하)인 관리가 묵던 곳입니다.

IMG_1184 서익헌 앞의 옛우물
IMG_1164 사마교비

동익헌앞 우측으로 많은 비석이 있습니다. 이중 사마교비가 있는데 1011년(고려 현종2) 거란의 침입을 받아 현종이 남쪽을 피난가다 제2대왕 혜종의 공향인 나주에 와서 10여일 머물렀습니다. 이 때 네마리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다리를 지나갔는데 이후로 이 다리를 사마교라 하였다고 합니다.

사마교비는 조선시대 사마교를 보수한 내력을 기록하여 효종2년(1651)에 세운 것으로 원래 서내동에 있었던 것을 1968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규모는 높이 100cm, 너비 37.5cm입니다.

IMG_1166 금성토평비

금성토평비는 조선 고종31년(1894) 동학농민운동때 나주읍성의 수성군이 동학군과 싸워 나주성을 지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95년에 세운 것입니다. 원래는 나주목 관아 정수루 앞에 세웠으나 1930년 금성관 앞으로 옮겼다가 1976년 현 위치로 다시 옮겼습니다.

IMG_1169 동익헌 뒷모습
IMG_1176 은행나무(보호수)

수령650년의 은행나무로 1982년 12월에 나주시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입니다.

DSC01670 금성관에서 본 모습

금성관은 전남지방에 많지 않은 객사중의 하나로 그 규모가 크고 나주의 대표할 만한 건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나주 금성관은 전라남도 유형문화 제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여행 TIP

소재지 : 전남 나주시 과원동 109-5
전화 : 061-331-8613
입장료 없음

 금성관 위치도

- 드래곤의 사진속 세상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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