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생포 왜성에 오르니 아름다운 울산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성곽에 오르는 길에서 일본관광객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서생포 산정상에 우뚝선 성곽을 보고 일본인들에겐 나라를 키우기위한 조상의 노력이 곳곳에 숨어있으나 우리에겐 축성작업에 동원되어 큼지막한 돌을 깨고 날랐던 지도자를 잘못만난 민초들의 한이 겹겹히 쌓여있다.
동영비치타워 아파트 앞에 주차를 하고 아스팔트길을 따라 걸어올라가면 화살표로 표시된 서성포 왜성 안내판이 나타난다.
안내판을 따라 바로 꺽어지면서 오르면 우리의 삶이 그대로 묻어있는 조그만 논, 밭이 보이면서 누구네집 담벼락 같이 생긴 약간 뉘어진 성벽이 보인다.
제일 먼저 사선으로 약간 뉘어진 성벽이 나타난다. 모서리 부분은 다른쪽 돌과는 달리 높이 7미터 정도의 직선으로 되어있다. 사선은 위엄을 나타내는 선이라 한다.
성벽은 외성의 경우 바깥쪽에만 돌로 쌓은 내탁식(內托式)으로 하고 내성은 안과 밖 모두를 돌로 쌓은 협축식(夾築式)으로 축조하였으며, 기울기는 지면에서 60도 내외이다.
성벽옆에는 방어용으로 물을 채워놓았던 해자가 만들어져 있다. 지금은 이 해자가 메꾸어져 논,밭으로 활용되고 있지만 아직 그형태는 그대로 남아있다.
서생포 왜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3년(선조 26년) 5월부터 일본장수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가 지휘하여 돌로 쌓은 16세가 말의 일본식 평산성이다. 회야강 강구의 작은 포구를 끼고 해발 133M고지의 산정에 내성을 쌓고 동쪽 경사면을 이용하여 복잡한 구조의 2단,3단의 부곽(副郭)을 두었으며, 그 아래로 산 아래까지 점차 길고 넓어지는 외성을 배치 하였다. 성벽밖에는 2,3중으로 호(壕)를 둘렀다.
성곽의 전체면적이 호를 포함하여 46만평에 이르고 호를 제외한 성 외곽부의 길이가 약 2.5km, 평면상의 직선거리는 동서 약 870m, 남북 약 370m에 달해 남해안 각지에 산재하는 왜성 가운데 가장 웅장하다.
서생포왜성 비석이 있는 곳엔 차몇대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고 문화해설사 부스가 있다. 여기엔 왜성안내도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이 성문은 내성으로 들어가는 주출입구로 성벽의 잔존형태로 볼 때 축성 당시에는 상부에 문루가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문을 들어서면 정면과 우측면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사각형의 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것은 진입로를 굴절시킴으로써 성내부를 볼 수 없게 하고 유사시 사방에서 공격을 가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든 것이다.
내성은 수개소의 소곽(小郭)으로 구성되는데 각 소곽의 전면에는 전부 이와 같은 출입시설을 설치 하였다.
남측으로 돌출되어 축조된 이 소곽(小郭)의 주위에는 3개의 출입구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남측으로 열린 되형 출입구는 성밖으로 나가는 내성의 부출입구이며, 동측출입구는 하단의 주출입구로 이어지고 북측의 직진형 출입구는 산정부로 연결된다.
이러한 지점에 위치한 이 소곽의 규모는 작지만 3개의 출입구를 동시에 수비, 통제하며 자체적으로 독립해서 전투를 수행하는 기능을 지닌다.
성곽에 오르는 도중에 왜성에 어울리지 않게 허무러진 성모서리에 누군가 주변의 돌을 모아 세운 돌탑이 세워져 있다.
왜성 성벽의 사선이 위엄을 나타낸다 하나 그위에 돌탑은 곡선으로 덧대어져 말없이 왜성에 서있다.
이 소곽은 내성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으로 동측과 서측에는 엇물림형 출입구와 소곽을 배치 하였고 남측과 북측은 석루를 둘렀다. 북서모퉁이에는 천수대로 짐작되는 남북 18m, 동서 17m 높이 5m의 석단이 놓여있으며, 축성당시 상부에는 3층에서 5층 규모의 천수각이 있어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박혀있는 돌들이 많은데 이돌 들이 전투에 쓰기 위한 돌들이었다 한다.
현재 산정에는 높이 약 5m의 천수대가 남아있으나 지금은 횡하니 지적측량에 쓰이는 지적삼각점표시가 설치되어있다.
가운데 사선까지가 임진왜란 때 천수대 자리이고 정유재란때 왼쪽으로 더 확장하였다 한다.
일본식 우물이 보통 사각형으로 만들기 때문에 여기가 우물터로 추정된다고 하나 우물보다는 아래 마을에서 우물을 길러 저장한 곳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출격용 소곽은 배후의 주곽(主郭)을 방어하고 군대의 출진시 그 움직임을 은폐, 보호함으로써 안전한 출격을 도모하기 위한 시설이다.
성을 처음 쌓은 임진왜란기에는 남측과 북측에 출입구가 설치되어 출격용 소곽으로서의 역활을 수행하였으나 정유재란기인 1598년 정월의 울산왜성 전투를 전후하여 2개의 출입구를 모두 폐쇄함에 따라 그기능이 완전히 상실되었다.
장군이 먹던 우물터라는데 현장에서는 확인이 안된다.
서생포 왜성은 임진왜란 이후 1593~94년 사이 1년사이에 쌓았는데 여기에 성을 쌓은 주요목적은 물자보급과 이순신장군의 뱃길 차단이 목적이라한다. 일본에서 물자를 수송하기 좋은 위치에 성을 만들었으며 서생포 왜성을 기점으로 전라도 순천까지 30개의 크고 작은 성을 임진왜란 부터 정유재란 끝날 때 까지 성을 쌓았다고 한다.
왜성에는 일본인들이 심은 오래된 벚꽃나무가 많다. 벚꽃이 만개되면 장관을 이룰 것 같다.
아래 사진은 내려오면서 본 서성포 왜성의 주변 풍경이다.
1598년(선조 31년) 명나라 마귀(麻貴)장군의 도움으로 성을 되찾았고, 1년후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53년의 충신들을 배향하기 위해 창표당(蒼表堂)을 세웠으나 지금은 파괴되어 터만 남아있다.
서생포 왜성은 임진왜란 직후부터 1895년 까지 약 300년 동안 조선 수군의 동첨절제사영(同僉節制使營)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서생포왜성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있다가 일본사람들이 만든성이라하여 현재는 격을 낮춘 울산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있다.
[여행 TIP]
소재지 :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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