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홍(철쭉)으로 둘러싸인 평산성, 고창읍성
고창읍성(高敞邑城)은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왜침을 막기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축석한 자연석 성곽입니다. 일명 모양성이라고도 하는 고창읍성은 야트막한 산등성이를 끼고 평지에 축성되었습니다.
고창읍성의 둘레는 1,684m, 높이 4~6m, 면적은 165,858제곱미터로 동, 서 북문과 3개의 옹성 6개소의 치성을 비롯하여 성밖의 해자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습니다. 고창읍성을 한바퀴도는데는 약 1시간 소요됩니다.
IMG_2548 북문의 옹성
옹성은 성문의 공격을 어렵게 하기위하여 옹성을 쌓았고 그 옹성위에서 적들을 공격할 수 있는 기능도 있도 록 하였습니다. 이와 달리 치성은 성밖으로 튀어 나온 곳입니다.
IMG_2703 북문(공북루)
성은 방어의 목적이므로 보통 산에 건설합니다. 그러나 고창읍성, 해미읍성, 낙안읍성은 바닷가에 그리고 평 지에 쌓았습니다. 평지에 쌓은 이유는 고려말에 왜구이 침입이 워낙 많았다고 합니다. 고려말 40여년동안 왜구가 500여 차 례 침입했다 하며 고려말 우왕때는 왜구가 837회나 침입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읍성은 주민들이 살다가 왜구가 침입하면 임시적으로 적을 피하는 시설이었습니다. 고창읍성에는 80년대초까지만 해도 읍성안에 고창여자 중학교가 있었습니다.
IMG_2556 답성놀이상
북문 잎구에 답성놀이상이 있습니다. 돌을 머리위에 이고 성을 한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바퀴 돌면 무병 장수 하고 세바퀴 돌면 극락승천한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성곽은 해빙기때 돌이 뜨기 때문에 돌을 밟아줘야한다고 합니다. 돌밟기에 사람동원이 어렵자 그때 성을 한바퀴 돌면 다리병이 낳고, 두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바퀴 돌면 극락승천한다는 말을 만들어 한바퀴만 돌아도 되는데 세바퀴씩 돈다고 합니다.
돌을 이면 더좋다하여 무게를 더 높이하여 성곽의 돌을 밟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답성놀이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고난 돌은 성안에 쌓아놓아 적들 공격시 투석전으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방어의 기능도 있고 성곾의 돌을 밟아 다지는 기능도 했습니다.
IMG_2557 그레이공법으로된 성벽
성쌓기를 보면 허튼층 쌓기와 바른층쌓기가 있습니다. 바른층 쌓기는 돌을 다듬어 만들어 보기는 좋으나 나무로 치면 돌이 밀려납니다. 그러나 허튼층은 돌사이사이 아귀가 맞아 웬만해서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런 공법을 그레이 공법이라 합니다.
방어를 위해 구멍이 밑으로 하나 있고 멀리 볼 수 있는 곳이 두개가 있습니다. 밑으로 하나 있는 것은 가까운 곳에 있는 적을 공격하기위한 근총안, 멀리있는 적을 공격할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을 원총안이라 합니다.
이어지는 성벽위에 끝트머리가 튀어나와있습니다. 이를 미석이라하는데 한가지는 이 곳이 추웠다가 해빙시에는 돌들이 뜬다고합니다. 그래서 쌓인 눈들이 최대한 성벽 밖으로 떨어지도록 빼놓아 쌓은 것이라 합니다.
전술적으로는 미석위에 큰 돌을 올려놓으면 사람들이 밟았을때 견디나 한번 더 힘을 주면 돌이 들리게끔하여 마지막으로 적 들을 떨어뜨리게 하는 역활을 한다고 합니다. 미석은 우리나라 건축양식의 특징으로 조상들의 지혜로운 성이라 할 수 있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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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은 보통 성 뒤쪽에 있는데 여기는 입구에 있습니다. 이는 관리자들이 이문을 통과하면서 혹시 옥에 억울하게 있는 사람들을 구제하기위해 입구에 만들었다고 합니다.
윤달에는 돌을 머리에 이고 성곽을 3회 돌면 무병장수하고 극락승천 한다는 전설이 있어 지금도 부녀자 들의 답성놀이 풍속이 있습니다.홍화루옆 성곽을 따라 오르는 길이 답성놀이의 시작점입니다. 성곽을 3번 돈다는 것은 결국 운동이 되는 것이니 건강에 좋을 것입니다.
IMG_2568 척화비
여기 비는 조선말기에 대원군의 지시로 세운 척화비로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상징입니다. 병인년(1866)에 비문을 만들고 신미년(1871)에 세웠습니다. 당시 서양의 열강들이 무력을 앞세워 문호의 개방을 요구학 엄청난 힘으로 밀어 닥치자 흥선대원군은 이들이 위협에서 나라를 지키는 길은 쇄국정책을 펴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 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IMG_2570 산벚꽃나무
여기에 있는 산벚꽃나무는 다른나무와 생존을 위해서 자기몸을 키우고자 햇빛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키가 크다고 합니다. 벛꽃은 화려하지 않지만 나무는 단단하다고 합니다.
IMG_2593 서문(진서루)
IMG_2599 맹종죽림사적
관상용인 맹종죽은 중국이 원산지입니다. 1938년 정월 유영하 선사가 불전의 대중포교를 위해 이 곳에 보안사를 세우고 그 운치를 돋우고자 조성한 것입니다.
IMG_2629 객사
조선시대 출장온 관리들이 묶었던 객사입니다.
IMG_2648 자산홍이 피어있는 성곽주변
성곽주변엔 자산홍이 붉게 피어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철쭉이라 부르는데 정식이름은 자산홍입니다.
IMG_2654 동치에서 본 동문
IMG_2659 동문
고창읍성의 축성은 조선6대 단종(1453)때 축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고창읍성을 쌓을때는 전라좌,우도의 각시군에서 사람을 차출하여 제주치, 고창지 등 구역별로 건축실명제로 지었다고 하며 건축에 참여한 구간은 해당지역에서 보수공사까지 책임을 지었다고 합니다.
IMG_2671 동문(등양루)
IMG_2675P 고을표석
고창읍성은 조선세종 32년(1450)에 전라우도 14개마을, 전라좌도 5개 등 19개 군, 현이 참여하여 3년만인 단종원년(1943)에 완성하였습니다. 축성당시 각 고을에서 성 쌓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자기들이 쌓은 구간과 고을 이름을 성벽에 새겨두고 갔었는데 오랜세월이 지나는 동안 일부가 훼손되어 잘 보이지 않아 각종 문헌과 현장조사자료를 참고하여 1997년 고을 표석을 만들어 축성구간을 찾아 성외곽에 세워놓았습니다.
IMG_2680 동북치
이곳에서 1919년 고창청년, 학생 2백여명이 독립만세를 불렀다고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IMG_2682 동북치에서 본 풍경
IMG_2691 연못과 풍화루
풍화루는 고창읍성 연못옆에 세운 2층 누각으로 1989년에 복원한 것입니다. 원래 건물과 연못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있었느나 앞에 연못은 1990년에 복원하였습니다.
IMG_2692 고인돌(지석묘)
지석묘는 일본식 표현으로 고인돌이 우리말이라 합니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전라남도 화순, 인천강화, 전북고창에 있는데 이 곳도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참고적으로 우리나라에는 9개의 세계문화유산과 1개의 세계자연유산이 있습니다.
고인돌은 남방식과 북방식 고인돌이 있는데 남방식은 다리가 짧고 땅을 파 시신을 안치하고 그 위에 덮개 돌을 덮었습니다. 북방식 고인돌은 다리가 높고 그위에 덮개를 덮는 식입니다. 고창 고인돌이 특이한 것은 남방식, 북방식 방식 고인돌이 만나는 지역입니다.
그러나 여기 고인돌은 옛고인돌이 아니고 고교학생들이 고인돌 축조과정을 재현하면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읍성과 관계가 없어 생뚱맞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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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지에 있는 성은 평성, 산에 있는 성은 산성, 산을끼고 평지에 있는 성을 평산성이라 하는데 대체적으로 수원화성처럼 과학적으로 지어진 성으로 알려져 있고 고창읍성은 조선시대 초기에 남아있는 대표적인 읍성중의 하나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에 우리나라 읍성중 걷기에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행 TIP
소재지 :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산9
전화 : 063-560-2313
관람료 : 어른 1,000원, 청소년 600원, 어린이 400원
고창읍성 위치도
- 드래곤의 사진속 세상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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