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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이응노 화백의 사적지, 수덕여관

by 드래곤포토 2020.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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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여행] 수덕여관, 이응노 화백의 사적지

 

고암 이응노 화백은 한국회화의 독창성과 정체성을 확립한 예술가입니다. 이응노 화백의 작품 활동을 하던 수덕여관과 우물 암각화를 포함한 일대 1504㎡가 충청남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수덕여관은 충청남도 예산에 위치한 수덕사 일주문 왼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응노화백은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의 세계를 접목하는 시도를 한 근 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예술가로 국내뿐만 아니라 유럽 화단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수덕여관은 이응노 화백이 1944년 구입하여 6.25 전쟁 당시 피난처로 사용하였으며,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머물면서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옮기는 작업을 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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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수덕여관은 기존의 수덕여관을 헐고 2006년에 새로 지은 건물입니다. 원래 고암 이응로 화백의 전 부인이었던 박귀희 여사가 오랫동안 식당과 여관을 운영하였지만, 노환과 주변의 개발 사업으로 문을 닫아 방치하고 있다가 복원하여 지금은 수덕사 선미술관 문화전시공간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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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에 고암 이응로 화백의 고택 복원 기념석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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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여관 건물은 원래 미술가 나혜석의 건물이었으나, 1944년 이응로가 이 여관을 사서 부인인 박귀희 여사에게 운영을 맡겼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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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여관 간판은 고암 이응로 화백의 글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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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로 화백은 1950년 제자와 재혼하고나서 1958년 유럽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1960년 프랑스에 정착하여 미술활동을 본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하다 1969년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응로화백은 약 2개월간 다시 수덕여관에서 머물었습니다. 이때 뒤뜰의 너럭바위 위에 추상문자 암각화 두점을 새기게됩니다.

이후 프랑스로 간 이응로 화백은 1992년 귀국전시회를 앞두고 파리에서 죽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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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에 걸려있는 세계일화는 한승수 전 국무총리의 글씨입니다. 세계일화란 세계는 한송이 꽃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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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방이 이응노화백이 생활하던 방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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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여관 옆에 암각화가 그려져 있는 바위가 있습니다. 1969년 사면 된 뒤 다시 프랑스로 떠나기전 이곳에 머물면서 바위에 2점의 문자적 추상화로 암각화를 남겼습니다.

둘레 17m, 높이 85cm 또 하나는 둘레 7.6m 높이 75cm 의 바위에 문자체로 그림을 조각하였습니다. 글자 같기도 하고 사람 모양 같기도 한 것이 역동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그린 거냐고 묻는 이들에게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며, 영고성쇠의 모습을 표현했다. 여기에 네 모습도 있고, 내 모습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다" 라고 했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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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여관 뒷쪽에 이응노화백이 사용하던 우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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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사 위쪽에서부터 내려온 좁은 개울물이 집 앞으로 흘러 지나가고 개울 건너편에 여관을 배치하였습니다.

가운데 안마당을 두고 'ㄷ' 초가가 감싸고 있는 여관은 일제 강점기 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여관만 아니라면 소담 하면서 궁색하지 않은 전형적인 농가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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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여관은 2000년까지 이응로화백의 첫번째 부인이 운영하다 결국 2001년 92세의 일기로 조카의 집에서 타계를 하여 수덕여관은 2007년 수덕사에서 사들여 다시 복원을 하였습니다.

 

☞ 여행 TIP▷소재지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17-1
▷입장료 : 3,000원(수덕사 입장료)

 

- 드래곤의 사진속 세상풍경 / 이창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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